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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ivation: 네이버 블로그

#순수이성비판 요약 : 네이버 블로그

공부범위: 0 ~ 철강남 순수이성비판 마지막까지 (칸트 순수이성비판 초판 부분)

// 오류 지적해주시면, 바로 고치겠습니다. 근데 오류가 꽤 많아서 말하기도 벅차다 싶으면 댓글에 이 글은 읽지 말라고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식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우리가 어떤 것을 알 때 어떻게 아는 것일까? 칸트는 인식하는 과정을 두가지로 구분한다. 인식이란 먼저 대상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수용능력인 1. 감성과 그 감성으로 인해서 얻어진 여러 표상(빨갛다, 동그랗다, 달다)을 통합하여 어떤 개념(사과)을 만들어내는 사고능력인 2.오성으로 구분한다.

먼저 칸트는 감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감성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수용력이다. 이것을 직관이라고도 한다. 근데 칸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이유를 면밀히 분석하고, 인간의 한계를 알게 되면,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면, 본인 능력을 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어쨋든 칸트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한 것이 있지만, '순수'한 이유는 시공간이 있기 떄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순수는 경험/감각이 포함되지 않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왜냐하면 같은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경험/감각에 의해서 '다르게' 인식하곤 한다. 그것이 진리인가? 진리란 대상과 인식이 일치하는 경우이면서, 보편적(적어도 인간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칙, 물론 다른 존재는 다르게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이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순수한 이유는, 즉 진리의 관점에서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딱 시간과 공간 이 두가지 이유밖에 없는 것이다. (감각은 감성적 인식의 질료)

여기서 현상과 물자체, 질료와 형식의 개념을 요약해보자면, 현상은 정의로는 '경험적 직관의 무규정적 대상'인데, 쉽게 말하면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이라고 한다. 물자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칸트의 특징이 이분법적이라는 것인데 현상과 물자체도 이런 것이라고 한다. (현상의) 질료의 의미는 현상 중에서 감각에 대응하는 것이고(빨갛다, 동그랗다, 차갑다), (현상의) 형식은 현상의 표상이 일정한 관계에 의해서 정돈되도록하는 것이다(사과, 책상). 쉽게 말하면 질료는 감각, 형식은 틀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관점에서 공간과 시간은 순수직관, 현상의 형식(틀)이라고 한다. 현상의 틀.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시공간이라는 것이다! 현상의 틀이 시간과 공간인 이유는 무엇일까? 칸트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몇몇 근거들을 들고 있다. 이런 근거들을 대충 요약하자면 공간은 하나고, 인식에 있어서 유이하게 있는 선천적 표상이며, 추리된 개념(어떤 귤을 귤이라고 했는데, 다른 대상이 귤이라고 할 때 이것을 추리라고 하고, 그 다른 대상에 적용된 귤이라는 개념이 추리된 개념이다)이 아니며, 무한한 크기를 가지기 때문이다. 시간의 경우 경험적 개념이 아니며, 모든 직관의 기초에 있는 필연적 표상이며, 시간은 추리된 개념이 아니며, 시간의 무한성 때문이다.

이 결론의 증명 중후에 나오는 개념이 시간/공간의 1. 선험적 관념성, 2. 경험적 실재성 이라는 개념이었다. 우선 2. 공간의 경험적 실재성의 의미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인 현상에서 공간은 실재로 존재한다. 따라서 공간은 경험적으로 실재하다. 1. 공간의 선험적 관념성은, 물자체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경험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관념(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모든 판단(인식)은 선천적 종합판단이라고 하고 있다. 선천적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감각을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종합) 판단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구는 동그랗다. 이 명제는 분석판단(선천적 판단)이다. 술어 부분의 개념이 주어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 구는 빨갛다. 하면 이 명제는 (경험적 판단,) 종합판단이다.

이렇게 감성의 순수형식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을 유도하고, 이제 오성, 사고능력의 순수형식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했다.

비로 인상의 수용성 = 감성, 개념의 자발성 = 오성. 이 두가지 능력은 우열이 없다. '오성이 없으면 대상은 생각되지 않고, 감성이 없으면 대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내용[직관]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이렇게 선험적 감성론, 감성을 가능하게하는 순수한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지금부터는 선험적 오성론에 들어간다.

오성은 논리학이다. 논리학은 두가지로 나뉘는데, 1. 일반적인 오성사용의 논리학은 기본/일반논리학이라고 하고, 2. 특수한 오성사용의 논리학은 기관이라고 한다. 이게 뭔소린가 싶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일단 오성은 논리학이라서, 삼단논법으로 예를 들겠다. 모든 말은 갈색이다. 이것은 말이다. 따라서 그것은 갈색이다. ('그것은 갈색이다'는 형식상의 정(正)이다.) 이 삼단논법에서 결론은 형식상의 정이라고 한다. 이 뜻은 결론은 맞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논리학이다. 일반논리학은 사고의 절대필연적인 규칙을 내포하고, 대상들의 차이를 돌봄이 없이 본다. 일반논리학은 사고의 형식만을 다룬다. 그러나 문제는 사실 그것은 갈색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말은 갈색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일반논리학에서 이 결론은 참(정)일까? 그 이유는 근거(대전제)로 사용된 명제가 우리의 경험에서 판단했을 때, 거짓이기 때문이다. 기관은 이렇게 경험/감각/내용을 통해서 명제의 참/거짓을 판별하는 논리학을 의미한다. (텍스트로는, 정확한 의미로는, '어떤 종류의 '대상'에 관해서 바르게 생각하는 규칙'이다.) 그리고 이런 기관을 변증론이라고 하는 것 같다(변증론의 개념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토론해봐야 할 듯, 강의 27,28.).

사실 일반논리학은 순수논리학과 응용논리학으로 나뉜다. 순수 논리학은 선천적인 원리만을 다루고, 오성과 이성[추리]의 규준,이라고 한다. 이것을 진정한 학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학은 경험적 원리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응용논리학은 심리학(프로이트 이후 심리학을 의미하지는 않음)처럼, 경험에 의존하여 구체적이고 우연적 조건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근데 사고에도 순수한 사고와 경험적 사고가 있다고 한다.

선험적이라는 용어의 정의가 나온다. 요약하자면 선험적이라는 의미는 1. 선천적 표상(선천적으로만 사용된다)이어야 하고, 2. 표상들이 선천적으로 경험의 대상과 상관할 수 있는 가능성, 3. 선험적 인식의 반성/성찰/증명 가능성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감각은 선천적으로만 사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게 감각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있었따. 그러나 감각은 선천적으로만 경험의 대상과 상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공간은 옛부터 지금까지 선천적으로 존재해 왔기 때문에, 경험의 대상과 상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천적으로 제공해 준 것이다. 감각은 태어나고 한참 뒤에도 쓸 수 있지 않은가. 감각은 후천적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3. 그리고 이런 선험적 명제가 따질 수 있는 명제여야 한다. 왜 그래야하는지는 모르곘지만, 추측해보면 무엇이 선험적이다고 할 때 그것이 왜 그런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 않은가. 물론 이 3번쨰 항목이 필요한 이유는 솔직히 모르겠다. (토론하면 좋을 듯.) 근데 결국 선험적/경험적의 차이는 오직 논리 level에서만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 경험하고 있는 공간은 사실 선험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선험적의 정의의 두번째 항목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의 뜻은, 경험의 대상의 인식을 가능하게 선천적으로만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공간은 선천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후천적으로 경험하는 공간을 우리가 공간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험적/경험적은 논리적으로만 구분 가능한 개념이다.

그러나 사실 진리는 형식 뿐만 아니라 질료에 대해서도 적용이 되어야 한다. 책상에 대한 진리. 이것은 책상이다. 이렇게 인식하고, 실제 대상이 책상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그 대상과 인식이 일치한 것이므로 진리가 맞다. 즉 질료에도 진리는 적용이 된다. 근데 위에서 들은 삼단논법 예를 보았을 때, 실제 대상에 대한 참을 알지 못하고, 오직 형식상에서만 참인 일반논리학은 자기모순적이고 한계를 가지고 있다(일반논리학은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논리적 형식으로는 참이어도, 내용에 있어서는 거짓일 수 있기 때문.

그래서 어떤 것이 옳다/그르다를 판별하려면, 일반논리학 + 밖에 나가서 조사인 기관, 특수한 오성사용의 논리학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과학을 해야 한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연구한 자료를 바탕으로 기관을 사용해야, 어떤 명제의 참/거짓을 완벽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잘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 있는데, 선험적 논리학은 선험적 분석론과 선험적 변증론으로 나뉜다는 것은 이해를 했다. 선험적 논리학은 이제 오성 사용에서 순수/선험적 특성, 즉 형식만, 오성의 순수한 인식의 요소들을 다루는 부분, 사고할 수 있도록 만드는 틀/능력이 무엇일까? 그런 원리를 다루는 부분이라는 것은 이해했다. 그런데 오성의 순수 사고 형식을 물자체까지 대입해버리면, 변증적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책 41p). 그 뜻은 대상에 관해서 증명할 수 없는 부분까지 증명하려고 하면 변증론/기관의 영역으로 가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부분 이후 '따라서 선험적 논리학의 둘쨰 부문은 이런 변증적 가상의 비판이 아닐 수 없고, 그것은 '선험적 변증론'이라고 칭한다'. 라는 내용이 이해가 안되는데, 이거는 책을 더 읽어가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일단 계속 더 책을 읽어보고 판단해보겠다.

순수한 오성 개념/형식을 분석하기 위한 네가지 전제: 1. 개념은 순수해야 한다. 개념은 경험에서 오면 안된다. 2. 순수한 오성 개념은 감성/직관에서 고립되어있어야 한다. 3. 순수오성능력을 발견하면, 어떤 개념/형식을 발견할 텐데, 이 개념은 기본개념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기본개념이란 범주다. 합성개념: 경험이 결합된 개념, 파생개념: 순수한 기본개념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된 개념이다. 4. 개념에 관한 표는 완전하고, 순수한 오성의 전범위와 완전히 합치해야 한다는 것. (오성의 순수한 개념은 표(행렬)이다. 이러한 표에 의해서, 우리 사유의 모든 범위와 완전히 합치되고 일치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이 표에 저촉되지 않고, 우리 사유는 순수개념이 필요 없다고 한다면 또는 물자체까지 개념을 가지고 사유할 수 있다고 한다면, 오성의 순수한 개념이라고, 사유 근간을 흔드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 사유가 다양하듯이, 단 하나의 개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다양한 사고가 근원적 표/범주에 적합할 때, 그것을 참된 사고로 구별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학문의 완전성은 무엇일까? 학문의 완전성은: 1. 오성의 선천적 인식의 전체라는 이념, 2. 이 '전체를 형성하는 개념들'의 일정한 분류, 3. 개념들을 하나의 체계로 조직하는 것, 이 세가지 일에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게 뭔소린가 싶다. 풀어보자면, 어떤 학문을 포괄하는 어떤 이념, 이 이념에 입각해서 분류할 수 있고, 체계적으로 정립할 수 있을 때. 이럴 때만이 한 학문이 완전하다고 한다. (수학이라는 학문은 그 자체로 완전하기 때문에, 과학하고는 다르다.) 이렇게 우리 과목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오성의 순수한 인식[요소]의 합계는 하나의 이념 아래 파악되고 규정되는 체계(표)를 형성하겠다고 한다.

개념의 분석론에서는, 일반논리학의 분석이 아니라, 모든 사유/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오성능력 자신의 분석을 한다고 한다(선험철학: (오성의) 선천적 개념들(공간 등등)의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것). 왜 이 컵을 보고 초록색이라고 생각/인식하지? 이것을 사고 관점에서 보엤다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인가? 우리의 경험에서 오는 정보, 판단들을 더욱 신뢰할만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능력을 먼저 파악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떄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성의 순수한 개념/형식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 경험 내에서 우리가 얼마만큼 이성적/합리적 사유를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성의 순수 형식(개념) = 범주, 감성의 순수 형식 = 시간/공간. 오성의 원래 정의는 비감성적인 인식작용이었는데, 이제는 여러가지 표상들을 하나의 표상으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오성의 기능= 통일작용. 오성의 특징으로는 간접적이라는 것이 있다. 대상은 직관/감성과 직접적으로 상호작용, 작관을 거친 표상들을 간접적으로 통합/종합해서 하나의 표상을 만들어내는 것.

근데 이런 사고의 틀은 경험을 통해서 주어지나? 아니다! 경험은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키는거지, 즉 노인이 어린사람보다 지혜로운 이유는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지, 사고의 틀이 달라서/사고의 틀이 더 우월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결국 경험이 아니라 동일한 사고의 틀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을 범주라고 한다. 이러한 범주는 어떤 식으로 발견되었냐 하냐면, 예를 들어서 '사과는 빨갛다.'라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이때 '사과는 빨갛다.'는 가능하지만, 빨간 것은 사과다. 하면 이상하다. 즉 우리 사유의 틀이 있어서, 주어 개념에는 물체가 와야지, 이런 판단법칙, 사유의 틀이 있기 때문에 이상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칸트의 12가지 판단이 있는데, 오성의 형식이 12가지가 있다고 한다. 1. 분량, 2. 성질, 3. 관계, 4. 양상 이 4가지 분류에 각각 3가지씩의 판단이 있다. 사실 강의에서도 선생님께서 그러셨지만 지금은 이게 맞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고 하셨다. 근데 솔직히, 선생님께서 이 개념이 요즘 시대에는 맞지 않다고 여겨진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룬다고 말씀을 하셔서 그런지는 몰라도 솔직히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은 있다. 사고의 틀이라는 것이, 어떻게 내가 표상들에서 개념을 형성하게 될까? 라는 질문의 답일 것이다. 그럼 뭐 뇌과학적 관점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기본 판단도, 결국에는 뇌의 특성에서 비록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시대에는 뇌과학이 없었고, 그 뇌과학 위의 단계로 추상화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뇌의 구조로 인해서 생기는 (종합 능력)이 이런 판단들을 할 수 있게 만들지 않나?라는 생각. 근데 모든 판단이 12가지로 나뉜다고 주장하려면, 완전 수학적으로 증명해야 증명가능하지 않을까 싶긴 하다. (내가 잘 이해한건지는 싶다. 오성부분부터는 확실하게 이해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런 범주가 옳다 그르다는 시대착오적 논의라고 한다고 한다. 그냥 겸손하게 공부하라고 하시는 것 같음.)

오성의 순수한 개념 = 범주. 인간이 사용하는 기준이 되는 판단들은 12가지다. 인간의 12가지 판단이 근원적인 판단인 것이다. 1. 분량에는 전칭판단(모든 A는 B다.) 특칭판단(약간의 A는 B다) 단칭판단(이 A는 B다)가 있다. 2. 성질에는 긍정판단(A는 B다.), 부정판단(A는 B가 아니다.), 무한판단(A는 非B다.)이 있다. 3.관계에 대해서는 정언판단(A는 B다.), 가언판단(만약 A가 B이면, C는 D이다.), 선언판단(A는 B이거나 C이거나 D이거나다)가 있다. 4.양상에는 개연판단(A는 B일 수 있다.), 실연판단(A는 B다.), 필연판단(A는 B이어야만 한다)가 있다. 여기서 성질의 무한판단은 포스트모던이즘적 사고에서는 중요하다고 한다. 지젝이라는 학자가 부정적인 것에서 머물기'라는 책에서 무한판단을 가지고 설명을 많이 한다고 한다. 무한판단은 장미는 붉지만은 않다. 장미는 꼭 붉기만한 것은 아니다. 즉 장미는 색이 다양, 가시, 잎/뿌리로 장미를 설명할 수 있게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부정적 방식을 통해서, 부정적인 형식을 통해서 사유의 무한한 확장을 열어주는 판단이다. (20230203 추가)

/* 강의 32장에서 발췌 (20230203 추가)

우선 분량에 관한, 전칭/특칭/단칭 판단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것에 대한 각주는, ‘전칭판단(모든 A는 B다), 특칭판단(약간의 A는 B다), 단칭판단(이 A는 B다)’ 이다. 분량에 관해서 판단하는 것은, 너무 쉽다. 알고보면 너무 간단하다. 양 또는 수라고 생각하면 좋다. 전칭판단은, 모든 것을 가르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모든 사람이라고 할 때, 다 가르키고, 죽는다는 것도 모든 사람에 해당하는 것이다. 1. 모든 것을 가르키는 판단을 전칭판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전은 한자로 모두전자다.) 2. 특징판단은 약간의 A는 B다. 이것은 일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상자에 들어있는 것은 사과다. 이 상자에 들어있는 사과는 빨갛게 익었다. 이런 식의 판단이다. 모든 대상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 가르키는 것이다. 단칭판단은 하나만 가르키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그럼 전칭/단칭판단이 결합된 것이다. 3. 소크라테스는 직업이 있다. 이러면 단칭판단 + 특징판단인데, 많은 직업군 중에서도 철학자를 가르키는 것. 이렇게 하나를 가르키는 것을 단칭판단이라고 보면 된다.

성질에 관해서는, 긍정/부정/무한 판단이 있다. 긍정판단은 단순하게 형식화시키면 A는 B다. 부정판단은 A는 B가 아니다. 무한판단은 A는 非B다. 이렇게 표현 가능하다. 긍정, 부정판단을 어렵지 않다. 이 장미꽃은 붉다. 붉지 않다. 긍정/부정판단이다. 무한판단은 무엇일까? 장미는 붉지만은 않다. == 장미는 꼭 붉기만 한 것은 아니다를 통해서, 장미는 색이 다양할 수도 있고 장미의 가시를 가지고도 장미를 설명할 수 있고, 장미를 이루고 있는 잎/뿌리, 여러가지 것들로 장미를 설명할 수 있게, 사유의 폭을 넓혀주는 것. 이것을 무한판단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 무한판단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특히 포스트모던이즘적인 사유에서는, 무한판단을 가지고 설명을 많이 한다. 예를 들어서 슬라브의 지젝이라는 학자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라고 하는 책에서 보면, 헤겔이 말하는 부정의 변증법, 이것을 실은 칸트의 무한판단과 비유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래서 무한판단은, 부정적 방식을 통해서, 부정적인 형식을 가지고 와서 사유의 무한한 확장을 열어주는 판단. 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관계에 관한 판단은, 정언판단, 가언판단, 선언판단이 있다. 분량/성질에 의해서, 칸트는 수학적 판단이라고 하고, 관계와 양상에 관해서는 자연과학적인, 역학적 판단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분량과 성질은, 수와 긍정/부정으로 얘기하고, 관계와 양상은 자연과학적으로 그것의 영향을 주고받음으로 하는 판단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정언판단은, 어떤 관계에 입각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우선 형식적으로 뭐라고 하는지 보자.

정언판단: A는 B다. 가언판단: 만약 A가 B면, C는 D다, 선언판단: A는 B이거나 C이거나 D이거나다. 1. 정언판단은 무엇이냐 어떤 것들이 조건 하에서 실현되는 것,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고 보면 된다. 봄이 왔으니, 꽃이 피었다. 2. 가언은 무엇일까. 진달래가 피었으니, 개나리도 필 것이다. 봄이라는 조건 하에서, 진달래가 피었으니깐, 개나리도 봄에 활짝 펴는 꽃이기 때문에, 진달래를 보고, 개나리도 피겠구나 예측 가능하다. A가 B라면 C도 D일 것이다. 3. 선언판단: 일정한 조건에서, 가능한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선언판단이다. 그래서 봄이 오면 목련,싹도 나고, 등등. 엄밀한 조건에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선험판단이다. 그런데 선험판단이, 무한판단과 비슷하다. 무한판단은 부정적 방식으로 사유를 확장시킨다면, 선언판단은 규정/긍정하는 방식으로 사유를 확장시키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양상에 관해서 보자. 1. 개연판단: A는 B일 수 있다. 2. 실연판단: A는 B다. 3. 필연판단: A는 B이어야만 한다. 개연판단은, 앞에서 이야기한 가언판단과 비슷하다. 진달래가 피었으니, 봄이 왔구나.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개연판단. 2. 실연판단은 지금 진달래 꽃이 피고 있다. 이렇게 내 눈 앞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실연판단이라고 보면 된다. 3. 필연판단: 반드시, 모든 것에 타당한 절대당연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봄이 왔으니 꽃이 필 것이다. 봄이 왔으니 반드시 새싹이 돋아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필연판단이다.

*/

분량, 성질에 해당하는 것은 수학적 판단, 솬계와 양상에 관해서는 자연과학적인, 역학적 판단이라고 한다. 그래서 분량과 성질은 수와 긍정/부정으로, 관계와 양상은 자연과학적으로 그것의 영향을 주고받음으로 하는 판단으로 얘기된다고 한다.

/* 강의 34에서 발췌, (20230203 추가)

먼저 1. 분량: 단일성, 수다성, 전체성. 1. 단일성은 하나만 있는 것을 말하고, 2. 수다성은 여러개를 말하는 것 3. 전체성은 모두를 말하는 것. 2. 성질은 1. 실재성: 눈 앞에 존재하면 실재하는 것 2. 부정성: 존재하지 않는 것, 없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3. 제한성: 일정한 조건 하에서만 존재하는 것. 예를 들어 어떤 학교의 수업시간이 9-3시. 9시 약간 이전, 3시 약간 이후. 늦은 밤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을 것. 그래서 일정한 조건 하에서만 존재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제한성이다. 3. 관계 1. 속성과 자존성(실체와 우유성/우연성): 실체와 속성. 예: 사과. 빨갛다. 달다. 이런 것은 속성. 이런 것은 근데 사과는 아니다. 다양한 속성들을 셜집시켜주는 것이 실체다. 그래서 실체와 속성은 관계라고 본 것. 2. 인과성과 의존성(원인과 결과): 그렇다면 관계는 무엇일까? 원인과 결과, 결과가 원인이 되어서, 또다른 결과를 낳고, 또 아마 인식의 모든 틀은 시간처럼 계기적인 것이라서, 원인과 결과로 관계를 맺는다고 보고 있고, 3. 상호성(작용자와 수동자 간의 상호관계(작용)): 모든 것이 다 원인과 결과에 입각해서만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서 계기적으로 본다고 보면, 먼저 영상을 촬영해서 업로드하고, 또 영상을 보는 것이다. 근데 이 순간에 같은 영상을 본다. 이것은 인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냥 작용자와 수동자 간의 상호관계(작용)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인과적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상호성도 우리의 어떤 틀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4. 양상 1. 가능성-불가능성 2. 현존성-비존재성 3. 필연성-우연성. 양상에서는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할 것인가. 또 현재 이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현재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또 이것은 필연적인 것인가, 아니면 우연히 얻어진 것인가. 이렇게 관계맺는 것이, 사유하는 틀이, 양상에서의 필연성과 우연성이다.

*/

결국 우리 사고는 자발적인데, 표상들이 만들어지고 나서, 이 표상들이 받아들여지고 결합되는 것을 종합(synthesis)라고 한다. 이 종합은 순수하다고 한다. 즉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니깐, 순수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내용/감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만 파악되는 개념은 순수하다고 볼 수 있다. 분석판단으로만 인식이 가능한 요소는 순수하다는 것! 그래서 이렇게 통일작용하는 우리의 사유능력을 구상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50p ⑤, 인식을 위해서는 1. 감성을 통과한 표상들이 있어야 한다. 2. 구상력이 이 정보들을 종합한다 (3. 이때 구상력은 일정한 틀인 범주를 통관(꿰뚫어서 살피다)하여, 범주라는 규칙을 근거해서 종합한다.)

사고의 틀은 경험에서 온 것이 아니다. 경험에서 오지 않고 선천적으로 하는 종합, 이 종합을 통해서, 오성의 순수한 개념, 즉 범주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이거 이해 안됨... 종합이 이미 오성의 순수한 개념/형식 인 것 아닌가? 일단 모르겠다.) 순수한 종합과 경험적 종합. 경험적 종합은 오성의 순수 형식이 아니다. 선천적으로 사고를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순수한 종합=범주라는 것. (다음 문단을 보면 이해 가능)

근데 경험적 종합, 순수한 종합은 사실 근원적으로는 작용이 동일하다. 예를 들어서 중국어로 이야기하는 것과 한국어를 사용해서 이야기하는 것. 중국어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계속 경험적 종합이 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이 기저에 있는 언어구사능력을 만들어주는 것은 순수한 종합, 오성의 순수한 개념이 있기 떄문인 것이다.

이 오성의 순수한 개념인 범주(표, 12가지 판단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가 있는데, 요약은 그냥 생략하겠다.

(55p ⑪)'범주들을 정의하고 싶지만은, 이러한 정의를 나는 이 분석론에서 고의로 생략한다.' 에서 범주들을 이미 정의한 것이 아닌가? 이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토론해봐야 함)

느낀점: 일단 책을 다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오성부터는 뭔소린지 모르겠다. 선험적 논리학부터 이게 어려운건가? 어렵다는게 약간 수능 수학 30번같이 오랫동안 고민해봐야 풀리는 그런 느낌이었는데... 어렵다는게 이런 느낌은 아니였는데, 그냥 이해가 안되는 느낌이긴 하다.

(강의영상 34까지 정리.)

35.

사실문제란 피해자가 잘못했는지, 밝히는 것. 권리문제란 어떤 범죄가 소명되었을 때, 몇년형을 집행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 칸트는 권리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따라서 사실의 문제보다, 연역의 문제, 원리와 원칙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한다. 연역은 일반 개념으로 개개의 사례에 적용하는 것이다. 귀납은 개개의 사례를 통해서 일반개념을 도출하는 것이다. 경험론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귀납이고, 이들은 연역적 방법을 게을리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았을 때에는 확실한 것은 귀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운, 운명같은 개념은 5가지 감각기관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일상의 많은 개념들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어서 생긴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원리/원칙에 비추어서, 다양한 경험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상은 원리와 원칙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칸트는 우리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를 밝히려고 하는것이고, 이 원리를 밝히는 것은 선험적 연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36.

귀납적 방법으로는, 개개의 것의 판단을 통해 일반개념으로 갈려는 방법은, 인식에 관한 소유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로크를 비판하고 있다.

순수이성의 분야 == 무제약자의 세계. 제약자란 나, 우리, 등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들. 제약자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가 무제약자. 왜 우리는 제약자에 불과한 존재들인데, 왜 순수이성의 분야로 나아가려고 할까? 왜냐하면 오감으로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영역, 이런 것이 형이상학. 행운/운명을 연구하는 것이 형이상학이다. 구체적인 한 인간, 해부, 검사를 통해서 몸을 연구하는 것이 형이하학적. 따라서 형이상학적 분야를 연구하는 것이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순수이성의 분야를 연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37.

모든 것은 개별적인 사건이다. 현상은 우리에게 사유를 주지 않는다. 그냥 정보만 나열할 뿐이다. 오성의 기능이 창문이 왜 깨졌는지, 우리가 갖게 된 정보들을 한 줄로 꿰어 맞추는 것이다. 이런 것을 꿰어줄, 우리 사고의 틀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해가 졌다는 것은, 경험적/습관적인 것에서 나오는 개념이 아니라, 어떤 원리/원칙에 의해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단적으로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철저한 논리/계산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경험/습관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인과는, 절대적/보편적 규칙을 주는 인과가 아니라, 확률로써만 알 수 있는, 상대적인 보편성만을 주는 그런 지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경험은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절대당연하고, 시간/문화가 달라져도, 여전히 달라질 수 있는 진리들을 제공해주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경험/습관은 상대적 보편성을 줄 뿐이다. 넓은 의미에서 의미가 있는 것들만 준다. 필연성까지는 다가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칸트에게는 연역의 방법이,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체계적 지식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38.

오성은 대상을 산출하지 않는다. 대상을 규정한다고 한다. 관념론자/합리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감성과 오성은 세계를 창조하지 않고, 경험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계의 정보를 수용하지도 않는다. 칸트는, 이 둘을 종합하고, 우리는 대상을 구성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심성에 맺힌 것은, 우리 인간의 틀 속에만 맞다.

우리가 직관하는 것들은, 현상하는 것들은, 어떤 하나의 개념을 전제해야 한다. 바로 이 개념이 있을 때, 범주도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모든 인식,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그 하나의 원리는 무엇인가?

39. 순수이성비판의 목적

선천적인 개념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 조건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경험과 모든 앎/인식을 설명할 수 있는 원리를 선험적 원칙에 의해 분명하게, 타당하게 발췌할 것. 그래서 선험적 연역을 하고 있다.

칸트가 로크와 흄, 영국의 경험론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선 흄은 그래도 사유의 선천적 개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했다고 한다. 근데 사유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밝히지 못했다. 인과성이 어떻게 대상에 결합해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흄은 일반적으로 원칙/진리는 습관과 기억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반복/경험을 통해서 얻어지고 확보한 것. 그래서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하지 않아도 진리는 있다. 이 주장에 대한 반례로 수학/과학이 있다. 1+1 = 2라는 공리는 배우지 않건 배우건 법칙/규칙으로 남아있다. 이것은 경험의 문제가 아니다.

로크는 경험에 의해서 얻어지는 원리들에 경험에서 얻을 수 없는 영역까지 마구잡이로 넣었다고 비판한다.

흄과 같은 경우에는, 회의론에 빠져 버렸다고 한다. 우리가 진리라고 여겼던 것이, 결국 우리 습관에 의해서 형성되어 버린 것이어서, 무엇하나 영원하고 불변의 진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사실 우리는 경험에 의해서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지구가 자전하고 있다는 원리에 입각해서 사유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경험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서는,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으로서 마음것 개발, 발휘해서, 우리가 현상을 창조하지는 못하더라도, 경험할 수 있는 것과 경험할 수 없는 것. 경험을 넘어서는 것. 그것의 한계를 명확히 하면서, 인간의 이성적 능력으로서, 마음것 개발하여, 우리가 현상 안에서 이성의 능력을 발휘해서 새롭게 인간에게 더 유익하게 구성할 수는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칸트가.

원래 오성은 대상과 간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했다. 근데 칸트가 이제 말을 바꿔서, 범주가 모든 대상 일반의 관계를 맺는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틀이라고, 인식의 틀이라고 말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 왜 그렇다면, 오성은 이미 사과는 가분적이다, 가분적인 것은 사과다. 이거는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벌써 이런 관계가, 사유의 틀(범주) 속에 심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일반논리학, 경험에서도 발견할 수 없고, 오직 선험적 논리학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68p 5번, 마지막 문장, 마지막 2번째 문장 잘 이해 안됨.)

40. 인간이 오류를 일으키는 이유

선천적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일 수 밖에 없다. 선천적 조건 == 사유/인식하기 위한 틀.

칸트는 감성과 오성이 결합되면서 발생된 오류를 두가지로 말했다.

1. 유령 개념을 들면서, 직관이 오성과 경합하면서, 대상이 주는 정보를 온전히 주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제외시키고 결합할 수 있다고 한다. 유령. 경험을 그냥 제외시켰다. 이렇게 잘못된 경험들을 종합해서 오류가 생긴다.

2.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험의 요소들을 넘어선 존재들을 생각한다. 신의 개념. 그리스도의 신. 인간이 자신이 경험한 영역을 넘어서 사유할 수는 있는데, 경험을 직접할 수 있는 영역인 것처럼 말한다면, 자의적, 상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 둘이 인간이 오류를 일으키는 이유 2가지가 된다.

따라서 인식과 경험의 근원적 요소를 찾으려고 한 이유는, 인간의 능력과 틀에 대해서 밝혀야, 우리 능력을 넘어서서 다른 모든 것까지 이러쿵 저러쿵을 방지하기 위해. 이제는 우리 사유가 가지고 있는 틀 내에서, 인식이 가능한 조건 내에서만, 우리의 경험도 설명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41. 오성이 대상을 산출하다.

범주가 선험적인 연역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 칸트는 처음에는 직관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고 했는데, 칸트가 했던 이야기를 뒤집어서, 오성만을 가지고도 어떤 대상을 산출할 수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범주가 대상을 산출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증명한다면, 선험적 연역도 완성된다고 말하고 있다. 대상과 관계하는 것이, 오성만 관계하는 것인가? 아니다. 직관이 우선적으로 대상과 관계를 맺고, 어떻게 범주가 대상을 산출하는가. 우리가 인식을 얻는 과정에서, 범주가 어떻게 대상을 산출하는지 밝히자. 오성의 사유능력으로도 대상을 산출할 수 있다. 범주가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경험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오성의 사유가 우리에게 경험을 주는, 전 과정이 각지, 재생, 재인이다.

즉 정리하자면, 감성을 통해서 만들어진 표상을 가지고 오성을 통해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은 맞다. 그러나 외부의 정보를 수용하는 감성화 상황에서, 수용하는 이런 과정에서 오성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는 것이다. 여기에 주안점을 두고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보는 것이다.

42. 직관에서 각지하는 종합.

모든 표상은 내감에 속한다. 그 모양이 변화되면서 우리 심성으로 온 것이다. 그래서 변양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표상, 변양, 정보들은, 시간에 관계해서, 그것이 배치되어 있다. 모든 표상들은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즉 표상들은 모두 대상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이 아니라, 심성에 맺힌 변양된 것이다.

내감의 형식인 시간이 순차적으로 나눠서 낯선 환경을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인식이 일어났다고 하면, 우리는 먼저 그것을 봐야 한다. 그것을 먼저 보고, 그것의 특성, 표상들을 종합하는 것을 각지의 종합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각지의 종합은, 오성이 없으면, 종합하는 능력이 없으면 감성이 주는 다양한 정보들을 종합해서 하나의 개념을 형성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우리가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모든 과정에, 표상들을 종합할 때, 오성의 작용이 들어간다. 이런 것이 각지의 종합 개념이다. 오성이 직관과 관계를 맺으면서 종합하는 것이다.

43. 구상에서 재생이라는 종합

머리 속에서 이전에 본 벚꽃을 재생시켜 보자. 다시 벚꽃을 재생시키는 것은, 이전에 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벚꽃의 모양과 냄새를 기억해서 떠올리는 것이기에, 경험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가능하려면, 우리에게 어떤 전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일정한 규칙에 입각해서 떠올려져야 한다. 각지의 종합에서도 눈 앞에 있는 벚꽃을 종합했을 때, 이렇게 모았을 때에도 일정한 규칙에 비추어서 정보를 얻었다. 우리가 머리 속에서 떠올릴 때에도, 눈으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법칙에 입각해서 종합을 해야 한다.

우리가 직관한 것과 머리 속에서 동일하게 재생할 수 있다면,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유의 틀/근거가 있을 것이다. 눈을 통해 정보가 들어오더라도, 그것을 처리하고 판단하는 것은 오성, 마음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즉 사유는 모든 경험 근저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각지/재생은 사실 때어내기 어렵다. 실제로 벚꽃을 떠올리게 되면 경험했던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따라서 각지/재생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의 틀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사유의 어떤 틀은 구상력의 선험적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44. 개념에서 재인하는 종합 서론

각지에서 종합하는 것과 구상력이 머리 속에서 재생하는 것이 동일하다고 하려면, '하나의 의식'이 중요하다고 한다.

표상은 그저 단위에 불과하다. 결국 단위들을 더하는, 사칙연산, 수의 개념 등의 것들은, 종합의 통일 의식에 존재한다. 즉 개별적 표상만 가지고서는, 칸트는 절대 하나의 전체를 표상해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의 전체를 표상하려면, 하나의 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 하나의 의식은 하나의 표상으로 결합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그 하나의 표상이 개념이다.

45. 의식의 통일

칸트는 표상에 대한 대상을 '어떤 것 일반, 즉 X'라고 표현한다. 이 뜻은 무엇이냐면, 우리는 대상을 전부 알지 못하고, 바로 현상에 대해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 대상을 직접적으로 알 수 없고,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다. 그래서 X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 현상을 알 수 있게 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의식의 통일이, 통각의 통일이라고 한다. 선험적 통일이다. 이 선험적 통일은 규칙/형식이 사유의 형식이라는 것을 통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물체를 삼각형으로 판단할 때, 3각형의 규칙을 통해서 그 개념을 인지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삼각형의 원형이 있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은 어떤 것 X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어쨋든 우리가 그저 규칙에 입각해서 다양한 삼각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저 대상은 언제나 X이지만,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이 구체적인 것들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든다. 만약 물자체의 영역이 없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구체적이지 않을 것. 보는 것이 전부일 것.

46. 선험적 통각

모든 인식은 개념을 필요로 한다. 아기들은 차가워도, 뜨거워도 응애 할 것. 감각에 대한 어떤 개념화도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개념이 없으면 인식이 절대 생기지 않는다.

어떤 개념은 규칙으로 사용된다. 삼각형. 내 앞에 대상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나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 즉 의식의 통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라고 하는 자기의식은 경험적이며, 가변적이라고 한다. 항존적인(영원한) 자아는 있을 수 없고, 이런 자기의식, '나'는 내감과 경험적 통각이라고 한다. '나'는 선험적 통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선험적 통각이 있어야,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이 되는 하나의 의식이 있어야, '나'라고 느끼는 경험적 통각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47. 선험적 통각

선험적 통각, 의식의 통일은 그 어떤 경험적 직관으로도 환원되지 않고, 다양한 경험적 직관들을 아우른다고 해서, 경험적 직관이라고 하지 않는다. 어떤 근원적 자아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인식은 인식에 앞서서 존재하는 선험적 통각의 '나'가 있기에, 외부 정보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원적 '나'.

우리는 언제나 대상들을 직접적으로 상관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변화무쌍한 표상들을, 하나로 연결해줄 수 있는 '근원적 나', 통각의 통일이 있어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48. 선험적 통각

현상은 대상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형식을 통해서 우리 마음 어딘가에 맺히는 것이다. 오성에 범주가 필연적이어야 하고, 감성과 오성이 가능하려면 선험적 통각이 있어야, 근원적 나, 하나의 의식이 있어야 경험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근대에서 생각하는 주체라는 개념이다. 내 자신이 있기 때문에, 내 주변의 세계도 형성되고 만들어진 것.

49.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칸트는 이야기하고 있다. 인식에 기준을 세울만한 것은, 학적인 경험, 학문적인 연구만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학적인 연구는 선험철학이다. 선험논리학. 선험논리학에서 쓴 방식은 연역적인 방법. 하나의 원리/이념을 제시하고, 다양한 것을 분류하고 체계지으는 것이다. 이것이 학문적인 연구방법이다. 이러한 관점을 사유에 적용시키면, 선험적 통각과 범주가 모든 인식과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기준이고, 따라서 우리의 모든 경험은 모두 개념에 의한 종합이기 때문에, 개념이 있어야 인식이 발생한다는 논리가 담겨있다.

범주 + 선험적 통각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눈 기준이 된다. 마치 시공간이 경험할 수없는 대상과 할 수 있는 대상을 나누었듯이. 그래서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났다.

50.

통일과 종합의 차이: 마구잡이로 모아두는 것이 통합,

종합: 우리의 선천적인 틀에 입각해서 통일하는 것.

원인 개념도 개념에 따른 종합이다. 사실 어떤 사건들이 일어난 것을 가지고, 감성은 어떤 대상을 그냥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직관 과정에서 종합하면서, 그것을 연결하게 된다. 인과 외에 다양하게 외부세계를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것이 선천적인 규칙이다. 이 규칙인 범주가 있어야 보편적이고, 동일한 통일을 할 수있다. 동일한 하나의 의식을 얻기 위해서, 선험적 통각과 범주는 꼭 필요한 것이다.

범주를 경험에서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선천적인 능력은 무엇인가? 규칙이라고 한다. 인과관계에 비추어서 알 수 있게 하는 것 등등. (범주). 봄 다음에 벚꽃이 핀다는 판단은, 결코 그냥 나올 수 없다. 봄과 벚꽃은 따로 있는데, 그것을 인과로 묶어주는 것이 범주다. 그래서 이런 범주라는 틀과 선험적 통각이 있어야,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51.

친화성: 유사한 것을 연상할 수 있는 능력. 동그라미에서 바퀴, 접시, 지구본을 떠올리는 것. 이런 것이 경험적 친화성이다.

규칙: 다양한 표상들이 언제나 같은 모양을 띠도록 만드는 보편적인 표상.

법칙: 규칙의 규칙 (?)

자연은 사실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52.

칸트가 말하길, 경험이 가능한 이유는, 감관, 구상력, 통각이 필요하다고 한다. 감관은 5가지 감각기관. 구상력은 종합적으로 다양한 정보/표상을 통일할 수 있는 구상력. 구상력은 오성의 기능으로, 종합하는 기능이다. 통각은, 일정한 틀을 통해서 받아들인다. 형식에 의해서 받아들인다. 분류, 구분할 때, 사유의 틀을 통해서 종합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재인. 머리 속에서 떠올리는 정보들이 언제나 동일한 것이구나. 왜? 사유의 틀과 통각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안에 맺힌, 우리 뇌에 맺힌, 다양한 정보들을 날려보내지 않고, 통일하는 그 시작점이, 선험적 통각이라고 말하고 있다.

53.

즉 선헙적 통각은, 종합을 통해서 얻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자연스럽게 표상을 통일하는 능력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생산적 종합: 선천적 종합

경험적 종합: 경험한 것을 모아놓은 것이 재생적인 종합.

54.

순수한 오성과 순수한 구상력의 차이. 오성의 순수한 개념은 범주. 순수한 구상력, 종합하는 구상력에 선험적 규칙, 틀이 있어야 사유가 된다. 사유의 규칙이 범주.

우리에게 최초로 주어지는 것은 현상이다.

현상이 의식과 결합되었을 때, 그것을 지각이라고 한다.

각지: 구상력이 지각들에 직접 미치는 작용.

구상력은 직관의 다양을 하나의 심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애기때 처음 주어지는 것은 현상이다. 그러다가, 의식과 결합이 되면, 지각했다. 따라서 최초의 지각은 감성이다. 이때는 다양한 표상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 애기떄 바다를 보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무언가를 분류하는 구상/연상작용이 없으면,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에서 중요한 것이 오성이다.

55. 구상력과 통각의 중요성, 반복

연상: 구상력으로 한 표상에서 다시 다른 표상을 이어주는 것. 연상이란 하나의 표상과 그것을 다시 재생하는 구상력과 연결하는 것이다. 표상-구상력-표상-구상력-표상-구상력. 이 과정을 통해서 각각의 표상들을 생각하게 되는 과정이 연상이다.

어떻게 해서 현상들을 모아서 연상할 수 있을까. 그것을 선험적 친화성이라고 이름붙였다. 이 선험적 친화성은 통각의 통일, 선험적 종각에서 나온다.

56. 항존적 자아, 각지, 재생

이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생산적 구상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선천적인 종합 능력, 선천적인 구상력, 오성의 기능에서 나왔다. 오성의 기능에서 나왔다. 이 재생력(구상력)은, 시공간과 범주를 통해 사유하여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항존적 자아가 사유에서 얻게 되는 모든 정보의 상관자다.

57. 자연법칙은 오성의 법칙이다

순수한 구상력은, 표상들을 종합해주고 이 표상들의 종합과 '선험적 나'(항존적 자아)를 연결해준다고 한다.

자연은, 심성의 변양이다. 그래서 자연의 규칙은 오성의 규칙이다. (그래서 인간이 사유하는 법칙을 연구하는 것이 자연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58. 오성은 자연의 입법자다

오성이 자연을 만든다는 뜻이다. 이 명제는 순수이성비판의 핵심적인 명제 중 하나라고 한다.

59. 연역 마무리, 그리고 새 책

항상성/정상성: 일반적 경험이 반복되어서 만들어진 진리.

이런 항상성의 진리는 경험이 매번 바뀌기 때문에, 보편적 진리는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60. 선험적 판단력 서론, 도식과 원칙

근데 여태까지 말한 감성과 오성만이 있다고 하자. 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이 둘이 결합해서 인식이 발생하니깐, 끝난 것 아니야? 할 수 있다. 근데 들어온 많은 정보를, 도대체 어떤 정보와 12가지 범주 중 어떤 범주에 결합시켜야 되냐, 이게 분명하지 않다. 실체와 속성이라는 범주가 있는데, 붉다/부드럽다를 실체에 둘까? 그럼 올바른 인식이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관계를 정리해주는 매개역할을 하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칸트가 말하는 판단력은, 표상들을 어느 범주에 적절하게 맞추는, 일정한 규칙에 포섭하는 능력이다. (판단력 = 감성과 오성, 시공과 범주를 매개해주는 능력)

61. 선험적 도식, 범주 더하기 시간

선험적 판단력은 오성의 순수개념의 도식, 순수한 오성의 원칙이라고 한다.

시간이 매개역할을 해서, 인식을 얻는 과정을 순수오성 개념의 도식 (=시간 + 범주) 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도식은 어떤 표로 정리된다.

예를 들어서, 실체의 경우 시간을 따라서 계속 그 현상이 유지되면 실체라고 인식한다고 한다. 반면 성질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동시 존재는 규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우연한 것들. 이런 것을 상호작용이라고 한다.

이게 왜 도식이냐 하냐면 모른다. 칸트가 그냥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전공이 아니면 그랬나부다 하고 넘어가면 된다고 한다.

근데 어쩃든 시간과 범주를 도식이 연결해준다고 나는 이해했다.

62. 순수오성의 원칙, 직관의 공리

오성과 현상을 결합시켜주는 또 하나의 법칙은, 오성의 순수한 원칙이라고 한다.

원칙은 범주와 도식을 결합시킨 것이다.

(분량)직관의 공리- 모든 직관은 외연량 혹은 연장량이란 원칙이다.

63. 순수오성의 원칙, 지각의 예료

(성질)지각의 예료- 우리가 어떤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면, 그것은 일정한 내포량(도, 밀도)를 가지고 있다.

64. 경험의 유추1, 지속성의 원칙

(관계)

시간 순서에 따라서 경험의 유추는 지속성, 계기성, 동시존재(상호성)의 원칙을 갖는다. 각각 제1유추, 제2유추, 제3유추로 표현된다.

관계의 원칙은, 개개의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대상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통제적, 역학적, 물리학적인 법칙과 같은 것이다.

지속성의 원칙: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은 다 현상, 심성의 변양이다. 즉 이 말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어떤 지속하는 무엇인가를 전제해야 한다. 어떤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장미라는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근저에 있는, 하나의 의식, 지속하는 것, 실체라는 것을 전제해야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질량보존의 법칙 같은 것을 생각하면 된다. 이 지속성의 원칙을 통해, 시간 등에 우리는 지속하는 것들에 종속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종속하는 것들로 인해 우리는 전부터 존재한 물질을 다른 상태로 단순히 추이하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 그저 이것에서 저것으로의 변화만 있을 뿐이다.

65. 경험의 유추2, 계기성의 원칙

경험의 제2유추: 계기란, 시간의 법칙을 통해서, 범주를 통과해서 규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의 법칙을 따른다. 이게 경험의 제2유추다. 범주, 선험적 능력에 의해서 가능한 것.

우리가 자연의 모습과 상태를 수용해서 파악하는 것 같지? 착각이다. 애초에 우리가 생각하는 인식 능력이, 법칙적으로, 관계와 규칙에 의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66. 경험의 유추3, 상호성의 원칙

상호성, 모든 물질들은, 동시존재한다는 것. 서로 다양한 작용을 통해서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

왜 상호성의 인식일 필요할까? 칸트는 인과성의 법칙으로는,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를 다 설명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 다양한 것들을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이 서로 다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냥 동시존재한다고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67.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

(양상에 관한 원칙)

양상의 제 1원칙: 형식적 조건과 일치되는 것은 가능적이다. 어떤 사물이 우리 앞에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 12범주라는 조건 하에서, 우리는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양상의 제 2원칙: 일정한 시간(지금)에 존재하는 사물은 현실적이다.

양상의 제 3원칙: 모든 시간에 존재하는 사물은 필연적이다. 필연적은, must라는 개념이다.

이 양상의 조건은 우리의 모든 경험적 사유의 보편적 원칙이다. 경험적 사유의 일반적 원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68. 칸트 사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도식과 원칙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시각능력은 직관형식이고, 범주는 우리 사유/뇌라고 생각하면 되고, 도식과 원칙은, 눈과 뇌를 연결하는 신경이라고 보면 된다.

원칙은 선천적 종합판단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성이 자연의 입법자라는 주장에서는 철저히 현상에 대해서만, 즉 물자체까지는 알 수 없는 영역, 인간 이성의 법칙을 대입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만, 오성이 자연의 입법자다.

69. 원칙 마무리, 라이프니츠와 흄

독일의 합리론을 대표하는 라이프니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개념들은, 우리가 다 가지고 태어나 것. 그래서 우리의 모든 판단은 보편적, 필연적, 경험을 통해서 새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고 헀다. (가라타니 고진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긴 한다.)

경험론의 흄은 모든 판단/개념은 경험으로부터 온다고 한다. 흄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을 구분하기는 하는데, 분석판단은 인식을 확장시켜주지 않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종합판단이라고 한다.

칸트는 이 둘의 주장을 뒤집어서 전혀 다른 이론을 주장한다. 어떤 현상을 받아들여 개념을 만들어낼 때, 아무렇게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떤 형식 - 미각/청각 감관- 이 있다. 이것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야 한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그것을 선천적 능력, 형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보편적 기준이 된다. 이런 틀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70. 이성은 신앙의 장소를 확보했나?

사실 오성은 현상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선험적 감성을 통해 맺혀진 표상들을 다루는 영역인 현상 말이다. 근데, 우리 사유는 자꾸 우리 경험의 영역을 뛰어넘으려고 하는 욕망/충동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욕망도 자연스러운 욕망인데, 이것은 모순에 빠지게 하려고 함인가? 아니면 오성 인식 사용을 확대하고 오성을 보다 가치있게 만들기 위함인가? 후자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직접적으로/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 고민하는 학문을 형이상학이라고 한다.

71. 이성의 논리적 사용, 직접, 간접추리

(이성 = 추리하는 능력, 오성 = 개념, 판단력 = 판단) 오성은 종합작용을 통해서 개념을 만들고, 판단력은 다양한 개념들을 포섭하여 하나의 판단을 만들고, 이성은 이런 저런 판단을 모으고 종합해서 추리한다.

직접추리: 하나의 판단에서 나오는 다른 판단. 어떤 명제가 주어졌을 때 대우가 바로 직접추리다. 모든 구는 둥글다는 판단에서, 어떤 둥글지 않은 것은 구가 아니다. 라는 명제가 바로 나온다. 이런 것처럼 바로 매개과정이 없어서 직접추리라고 한다.

간접추리: 하나의 판단에서 다양한 결론을 도출(매개념 O). 2개 이상의 판단에서 결론이 도출되는 경우 간접추리다.

칸트가 보기에는 이성이 진짜 중요한 역할을 하는것은 간접추리다. 하나의 개념/판단에서, 다양한 판단/개념을 파생시킬 수 있는 능력, 그것을 다 포섭할 수 있는 어떤 원리를 설정하는 능력이 이성의 능력이다. 일반논리학, 삼단논법을 간접추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성 추리는 관계(정언적=무조건적, 가언적=조건적, 선언적=배척적)의 판단에서 나온다. 정언적은 for all, 전칭명제. 가언적은 if a then b, 조건명제, 선언적: 장미는 a xor b xor c. 장미는 a. 따라서 장미는 ~b and ~c.

왜 이런 추리들이 가능한 것인가? 칸트는 그냥 그렇다고 한다.

72. 이성의 형이상학적(무조건자) 충동

칸트는, 이성도 결국에 판단력이나, 오성/지성과 같이, 종합/통일하는 능력이다. 이성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지식들에 대한 완전히 통일된 개념을 설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성을 논리적으로 사용할 때와 경험적으로 사용할 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1. 논리적으로 사용할 때에는, 일반논리학과 똑같이 대상을 고려하지 않는다. (즉 기관을 하지 않는다. 문장의 술어부와 주어부가 맞게 들어갔냐 등만 체크하는 일반논리학) 마치 3단논법처럼, 형식적으로만 타당하면 된다고 한다. 2. 우리가 경험적으로 사유하는 대상, 현상에 관한 것. 경험적 사용은, 인과율에 의해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즉 감성을 통해서 얻어진 그 표상을 가지고, 이보다 상위에 있는, 다른 모든 개념을 통일시키는, 그런 개념이나 판단을 가지고 사유하는 것이다. 즉 감성을 통해서 얻어진 표상을 가지고, 더 상위에 있는 모든 개념들을 통일시켜서, 개념/판단을 가지고 사유하는 것. 이것이 이성이다.

근데 결국 이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제1원인, 부동의 동자같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 이성의 충동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무제약자, 무조건자. 무제약자에 대해서 탐구하고 연구하는 충동을 느끼는 것이 바로 이성이다. 최초의 원인, 원인이 없는 자. 그것이 무제약자다. 따라서 이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다양한 경험들을 넘어서려고 하는, 최초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전혀 다른 사유능력이다.

이성은 71. 에서 나온 것처럼 정언적/가언적/선언적 판단의 추리를 통해서 이성의 논리적 사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각각의 추리를 통해 영혼, 세계, 신에 대해 사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조건적 판단. for all. 이것을 통해서, 인식 주관 근저에 있는 실체, 그것을 영혼이라고 하는데, 그것에 대해 사유/추리하는 이념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

-가언적 판단은 조건부에 따라서 생각하는 판단. 우리는 이를 통해 세계, 우주에 관한 하나의 이념, 추리를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선험적 판단, 배척적 판단은 어떤 하나의 실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속성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존재하도록 만든, 어떤 존재에 대해서 논리저긍로 파헤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고 한다. 이성은.

73. 비판의 시작, 이성의 오류추리

순수이성의 오류추리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어떤 것을 영혼이라고 해서 되에링은 심리학적 이념이라고 했다. 인간 영혼(마음의 실체)에 대해서 추리를 할 것인데, 12가지 범주였던 분량/성질/관계/양상이라는 4원칙들을 가지고, 우리의 영혼을 알아보는 것은 형이상학적 영혼론, 합리적 심리학이라고 한다.

1. 분량: 영혼은 단일하다. 즉 인격적이다.

2. 성질: 영혼은 단순하다. 즉 파괴되지 않고 불멸한다.

3. 영혼은 실체다. 즉 사유하는 실체다. (연장량, les cogitans라고 한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4. 양상: 영혼은 비물질적이다. 즉 정신적이다.

이런 주장은 이전의 논리학자, 철학자들이 영혼에 대해서 생각한 것을 요약한 것이라고 한다. 근데, 칸트 이전의 철학자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실체라고 생각했지만, 이것을 비판을 가하고 문제제기 하고 있다.

어쨋든 범주의 틀을 영혼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면, 이전의 학자들이 말한 것은 다 옳다. 그러나 범주를 적용할 때에는, 현상체들에게만 적용한다. 따라서, 영혼이란 우리 순수이성의 이념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성은 경험을 뛰어 넘으려고 한다. 이성은 이념의 대상들을 만들어 내지만, 만들어낸 대상들이 경험 가능한 대상일까? 그렇지 않다. 아무리 이성이 영혼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이것은 오성에는 들어오지 못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혼은 순수이성의 오류추리다. 이성의 형이상학적 충동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순수이성으로는 영혼은 파악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74. 이율배반, 우주론적 이념의 서론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되에링은 우주론적 이념이라고 말한다.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고 펼쳐져 있는지, 그것에 대해서 파악하는 이념이다.

이율배반

1. 분량: 모든 현상을 인식하게 만드는 틀인 시간과 공간은, 이런 조건은 한계가 있을까?

2. 성질: 세계를 다루는 물질은 다 단순한가? 아니면 복합체로서만 파악할 수 있는가.

3. 관계: 모든 현상들, 자연의 법칙들은 인과적인가? 아니면 인과의 법칙을 벗어난, 자유로운 개념이 존재할 수 있는가?

4. 양상: 모든 세계와 우주가 지금처럼 존재하게 만든 어떤 필연적 존재자를 증명할 수 있을까?

심리학적 이념과 우주론적 이념의 큰 차이에 여기에 있다. 우주론적 이념에서는, 심리학적 이념과 같이, '지금까지 그것에 대해 추측하고 추론한 것은 오류였다' 이렇게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율배반에 빠기지 때문이다. 이율배반은 쉽게 말해서 모순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그렇다/아니다 라고 말할 수 없는 모순이다. 이율배반은 가언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조건 하에서, 그 다음 것이 성립하느냐, 성립하지 않느냐 결론내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봄이 오면 꽃이 필 것이다. A 또는 B이면, C또는 D다 라고 결론 나와야하는데, 그래서 A면 C또는 D여야 하는데, A라고 하더라도 B,D로 결론이 날지 확실하게 장담할 수 없는 모순적 관계를 이율배반이라고 한다.

어떻게 하다가 이율배반에 빠지는가? 우선 칸트는 긍정적인 명제는 정립이라고 하고, 부정적인 면제는 반정립이라고 해서, 정립/반정립의 입장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온다고 한다.

우주론적 이념을, 분량/성질/관계/양상에 따라서, 정리를 하면, 1. 세계는 시간과 공간에 한계가 있는가, 2. 세계는 단순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3. 세계는 자연필연성, 즉 어떤 원인과 결과의 규칙에만 종속되는가, 아니면 이 규칙들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개념들도 존재하는가? 4. 마지막으로, 우리 세계 내에, 세계 처음에, 모든 것들이 존재하게 되는, 모든 것에 관여하는 절대필연적인 존재자가 존재하는가? 이것이 우주론적 이념에 대한 궁극적/기본적인 compact한 관심 영역이라고 칸트는 말하고 있다.

75. 분량과 성질의 이율배반, 첨예한 논리

분량: 분량에서는 세계, 어떤 총체로서의 세계를 의미한다. 세계는 분량과 성질에 관한, 수학적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다양한 것들이 총체적으로 모아져 있는 것이다. 관계적으로 파악되는 것을 자연이라고 한다. 어떤 현상체, 연장체의 총체로서의 세계가 세계다.

어쩃든 분량과 성질에서는 세계를 말하고 있다. 연장체들의 총체로서의 세계. 그런데 세계에 시간과 공간에 한계가 없다고 하는 것이, 세계라고 하는 개념에 모순된다고 한다.

반정립: 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시간은 애초에 시작이 없고, 공간도 한계가 없다고 말한다.

둘 중에 누가 더 옳을까?

이율배반 성질:

정립: 세계는 단순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쪼개다 보면 무가 남는다. 그럼 존재 가치가 없는 것.

반정립: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냥 공간처럼 비어 있는 것에, 나를 허용할 수 있는, 그런 것.

어느 것이 옳을까?

76. 관계와 양상의 이율배반 과연 결론은?

이율배반 관계

정립: 최초의 원인과 같은, 자유로운 행동, 시작이 있을 것이다. 이 자유는 왜 필요할까? 자유가 없다고 하자. 이게 말이 안된다. 왜냐하면 최초의 원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시작이 있어야 한다.

반정립: 세계는 자유로운 것은 없고, 언제나 자연법칙에 의해서, 저 인과의 법칙에 의해서 경험될 뿐이라고 한다. 알지 못하는 것들을 함부로 주장하는 것은 이성의 오만이다.

이율배반 양상

정립: 세계에는 절대필연적인 존재자가 존재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들은 모두 제약자다. 따라서 최초의 존재자가 있어야 함.

반정립: 원인을 어디에 설정해두어야 하는가. 보이지 않는데, 인식과 앎을 얻을 수 있을까? 없다. 파악되지 않는데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의 명제처럼, 말할 수 없으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77. 이율배반의 정립과 반정립이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대사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규정하는 것. 이것은, 우주론적 이율배반은,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은, 오류추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근데 이율배반은 여기서 끝나진 않는다.

78. 수학적 이율배반의 해결, 시차적 관점.

그런데 이율배반이 왜 생기는가? 결국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이율배반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럼 어느 관점? 정립의 입장에서는, 우리 사유를 물자체까지 확장시켰을 때, 정립의 입장이 나오는 것이고, 철저하게 현상의 영역 안에서만, 사물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반정립의 입장이 나온다. 우주론적 이율배반의 이성추리는, 오류추리와는 다르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철저하게 영혼을 어떤 물질적인 것,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유할 수 있는 것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오류추리는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 이율배반은 이 세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칸트는, 오류추리에서 본 것처럼, 이율배반을 단순하게 물자체라고 두고 오류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선입견에 불과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오히려, 칸트는, 정립과 반정립의 입장은,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라고 한다. 둘 중 하나로 정립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모순을 이율배반이라고 하고, 이 이율배반을 지젝은 시차적 관점이라고 한다.

(왜 이율배반은 하나로 정립할 수 없는지는 잘 모르겠긴 하다. 그냥 정립은 물자체의 영역이니깐 아닌거 아니냐? 어이가 없다. )

그러나 칸트는 정립의 입장을 옹호한다. 왜 그런가? 그래야, 우리의 연구가, 과학적 지식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비밀을 알고싶어하는 이유는, 우주의 시작과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인류의 발전이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칸트의 사상, 근대의 사상인 것이다.

79. 이율배반의 해결, 비트겐슈타인과 지젝

관계와 양상에서는, 모든 대상들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제1원인, 절대적인 자유와 같은 개념이 존재하는가. 이런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하자.

칸트는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의 영역에서는, 무제약적인 개념은 없다. 파악될 수 없고,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칸트는 이야기한다. 물자체를 인정할 수는 있지만, 인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적 자유/무제약자에 대해서, 긍정/부정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알 필요도 없는 존재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칸트는 덕의 영역, 실천이성비판에서, 신의 존재를 요청한다. 칸트는 또한 실천이성, 도덕적인 영역을 논하는 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순수이성, 학문적인 이론 이성보다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실천이성은 도덕, 예의범절 같은 것을 생각하면 된다.

칸트의 명제: 물자체는 인정할 수 있으나, 인식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 전기 철학에서의 명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명제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칸트는, 이성의 양극단 절벽을 가로지르고 싶었던 것이다. 이성의 한계, 이성의 능력 사이를, 통해, 더욱 사회가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절대적 근원적 존재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옹호하는 쪽으로 갈 것인가? 사실 보편타당한 이성이라는 것도 근대가 만들어낸 하나의 신앙이 아닌가? 이런 질문점을 주고 있다고 한다.

80. 순수이성의 이상, 신인식은 가능한가?

정언적에서는 오류추리, 가언적에서는 이율배반, 선언적에서는 선언적 추리, 선험적 이성추리.

데카르트가 말한 사유하는 능력은, 불완전한 인간이 스스로 가질 수 있었을까? 칸트는 결국, 인간이 가지는 불완전함 때문에, 신을 증명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존재와 근원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기 때문에, 최고실재자를 탐구했고, 그런 실재자에 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칸트 이전의 학자들이 신에 대한 증명을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1. 존재론적 2. 우주론적 3. 자연신학적 증명이다.

1. 존재론적 신 증명: 다양한 존재자는 신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도출. 다양한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의 존재가 증명된다고 한다. 신이라고 하는 주어 개념이 자연스럽게 파생된다 (?)

2. 우주론적 신 증명: 경험하는 현상들의 제일 원인이 되는 절대필연적 존재는 존재한다. 정립의 입장과 유사. 모든 현상들이 존재하려면 근원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

3. 자연 신학적 증명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의 합목적성, 아름다움에서 귀결하지만, 모두 다 신이라고 하는 절대필연적 존재자를 전제하고, 그것에서 자연스럽게 귀결시킨 논리다.

사변 철학은 초월적인 대상에 대해 증명하는 학문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우리 인식을 초월하는 대상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변화하고 증명하는 학문을 사변이성, 사변신학이라고 한다.

신은 단지 순수이성개념이다. 순수이성개념이란, 무슨 말일까? 이건 순수이성이, 우리 추리 능력이 만들어낸, 어떤 이념물, 이념형이라는 말이다. 객관적인 대상은 오성을 통해서, 이성은,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대상들을 파악하기 위해서 만든 어떤 원리에 의한 종합, 통제적 원리를 통해서 만들어낸 대상이다. 오늘 아침에 먹은 사과는 경험할 수 있지만, 의자 그 자체는 경험할 수 없다. 신도 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관계를 위해서, 정리해주는, 그런 존재라는 개념은 무엇일까. 칸트는 이런 개념을 연결어라고 보았다. ‘개사’라고 보았다. 그래서,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는, 개념과 개념은, 연결해주는 것일 뿐, 그것들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일 뿐, 그것이 있다고, 그것의 존재까지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런 뜻이다. 우리 말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늘은 푸르다. 영어로 이야기한다면, sky is blue. 직역하면, 하늘은 푸른 상태로, 파랗게 있다. 라고 말을 하겠다. 즉 이렇게, 하늘과 파랗다는 것을, 연결해주는 것이, be동사, 독일어로는 자인동사. 이렇게 존재를 들어내는 단어인데, 이것은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냥 연결어에 불과하다. 연결어에 불과한 것을, 대상의 존재까지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깐, 우리는 이런 그릇된 오류를 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존재를 단순하게, 연결어로, 개사로, 이야기한 것은, 누구한테 비판을 받을까? 하이데거에게 제대로 비판당한다. 아무튼, 칸트의 입장에서는, 그저 개념과 개념들의 관계를 설정해주는, 그 개념이, 우리가 착각을 해서, 오류를 일으켜서, 존재까지 증명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해서, 이와 같은 그릇된 추리를 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칸트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모순에 빠질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애초에, 이론적으로 이성적으로 신의 존재는 증명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 신은 어떤 대상일까. 우리 신앙의 대상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되에링의 평처럼, 진짜로, 신에 대한 우리 개념의 모순을 없앴을까? 그렇지는 않다. 신에 대한 우리 개념의 모순도 없앴지만, 그와 함께 신앙도 없애버렸다고 한다.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칸트는 신의 영역을 다른 장소에 두고 있다. 바로 실천이성에서, 신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순수이성에서는, 이론이성, 이 이성적인 신학의 장소에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아무런 객관적 정보/증거도,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81. 마무리, 마부위침.

마부위침.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 이 내용을 꼭 기억하며, 살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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