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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미움받을 용기1="">의 주관적인 정리 : 네이버 블로그

책 <미움받을 용기1>의 주관적인 정리

프로파일 무지성 2021. 7. 22.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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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받을 용기1>을 주관적으로 정리해 보았다. 사견이 좀 들어가 있다. 어쨋든 이번 책 정리는 크게 7가지 질문으로 정리해 보았다.

질문1: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렇다면 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문2: 목적론은 무엇인가?

질문3: 자유란 무엇이고, 자유를 추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문4: 자유를 추구하려면-인정 욕구에서 벗어나려면-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문5: 인정욕구의 동의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질문6: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7. 아들러 심리학에서 행복이란?

질문1: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렇다면 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고 한다. 열등 컴플렉스도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에서 부터 출발한다. 열등 컴플렉스란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의미한다. 특히 이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면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데 중대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 설명하게 된다. (A라서 B를 할 수 없다-원인론)

나 또한 열등 컴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중요한 것은, '이상적인 나'와 비교했을 때 생기는 건전한 열등감을 가져야 한다. 즉 남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경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변할 수 있다고 한다.

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자립해야 한다.

2. 사회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3. 나에게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4. 타인이 친구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위의 개념들은 왜 나온 것이고 어떤 개념일까?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까? 책 미움받을 용기1,2에서 이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다. 우선 미움받을 용기 1권의 내용을 정리해 보겠다.

질문2: 목적론은 무엇인가?

목적론은 원인론과 달리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문제 해결 접근법이다. 사실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자신의 인간관계/일에 관한 문제에서 원인론은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없으며 목적론이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목적론은 '내가 이렇게 행동/생각한 목적이 무엇일까? 그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질문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내가 이렇게 행동/생각한 목적은 항상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문제 행동이 나타난 이유는 당신이 변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항상 변하지 않으려고 결심하는가? 이것은 아들러 심리학에서 공리인 것 같다. 어찌 되었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목적론은 원인을 분석하지 말고, 나는 변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음을 인지하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접근법이다.

이와 같은 접근법에서, 화를 내는 목적은 무엇인가? 화를 내는 이유는 권력투쟁과 복수를 하기 위해 화를 내는 것이다. 목소리가 커졌다. 이는 화가 나서 목소리가 커진 것이 아니라 권력투쟁과 복수를 하기 위해서 화가 난 것이고, 화를 내기 위해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목소리가 커진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가 커진 목적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사과를 해야 한다. 바로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권력투쟁에서 멀어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바로 권력투쟁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권력투쟁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모르겠다. 대충 권력투쟁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정신적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함/문제 해결하기 위함이 아닐까?

어떤 사람이 싫어진 상황에도 목적론으로 접근해 보자면, 싫어하는 감정은 그 사람과 관계를 끊고 싶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관계를 피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생기는 감정이지, 타인의 어떤 원인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물론 타인의 어떤 원인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원인론은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 방법은 아니다. 목적론이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이다.

질문3: 자유란 무엇이고, 자유를 추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유란 미움 받을 용기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고 노력하지 않게 되는 것이 바로 자유다. 원래 나는 원하는 곳에 정신적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했다. 미움받을 용기는 인정의 노예에서 벗어나 정신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 같아서, 확실히 이 자유의 정의는 내 자유의 정의에도 타당해 보인다.

한편 인정욕구는 부자유를 유도한다고 한다. 인정욕구는 인정에 끊임없이 집착하게 하여 인정에 종속되게 만들기 때문인 것 같다. 따라서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으로써 인정욕구를 멀리하는 것이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인정 욕구를 멀리하는 방법에 알아보자.

질문4: 자유를 추구하려면-인정 욕구에서 벗어나려면-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정욕구를 멀리하는 방법은 '과제의 분리'다. 과제의 분리란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이다. 내 과제에 침범을 허용하는 것 또는 내가 상대방의 과제에 침범하는 것은 인정 욕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제'의 정의에 대해 궁금해진다. '자신의 과제'는 무엇인가? '타인의 과제'는 무엇인가? 책에서는 '그 선택이 가져오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로 누구의 과제인지 판별한다고 한다.

한편 현실에서 이 조언을 실행해본 결과, 과제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과제는 '자신의 선택'을 의미하는 것 같다. 자신의 과제에 타인을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내 선택 행동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 같다. 내 행동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의미는 선택에 따른 결과의 권한을 내가 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타인의 과제에 침범하지 않는 것의 의미는 타인의 행동 결정 권한을 함부로 내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쉽지가 않다. 내 자녀가 비도덕적 행동을 한다. 그러면 아이의 도덕성을 위해내 아이의 과제에 침범해야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상사/동료/직원이 잘못하는 것 같다. 이럴 때 그냥 조언만 해야 하는가?

쉽지 않다. 그러나 조언만 해야 한다. 타인이 선택에 대한 결과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과제를 침범당한 타인은 자신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권력투쟁과 복수의 단계로 접어든다. 아이의 경우 도덕적 행동을 강제하면 더더욱 비도덕적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 동료/상사/직원의 경우 일에 열정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질문5: 인정욕구의 동의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지금부터는 인정욕구의 동의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인정욕구의 동의어를 살펴보는 이유는 이 동의어들을 회피함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정욕구의 동의어에는 수직적 관계가 있다. 책에는 수직적 관계의 정의가 나와있지는 않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은 동기부여이지만, 수직 관계에 근거한 지원은 과제의 개입이다'라는 말을 통해 수직적 관계에 대해 유추가 가능하다. 수직적 관계란 타인의 행동에 대한 결정 권한을 가지거나, 자신의 행동 결정 권한이 타인에게 있는 경우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는 유추한다.

특히 주목해보아야 할 점은 칭찬하는 것이 타인을 수직적으로 대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칭찬이란 능력이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기 때문에 칭찬하고 있다는 것은 관계를 수직 관계로 보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칭찬은 타인을 조종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도 말이 된다. 왜냐하면 타인의 과제에 침범하는 것은 결국 타인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은 칭찬을 받을 수록 자신은 능력이 없다는 신념이 생기게 된다고 한다. 아마 노력을 해도 나는 계층 이동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내가 추측한다.

따라서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로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수평적 관계라고 함은 매너를 지키면서 타인을 의식 상에서 대등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평적 관계에서는 주장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 이는 민주적인 요즘 시대에 모두가 예라고 답할 때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줄 것 같다.

질문6: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책에서는 인생을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기 위해 1. 자기수용, 2. 타자신뢰, 3. 타자공헌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 1. 자기수용은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의 구분을 통해 바꿀 수 없는 부분을 수용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반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나는 무조건 할 수 있다'는 자기 긍정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자기 수용을 긍정적 포기라고 한다. 이를 통해 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2. 타자신뢰는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을 의미한다. 신용할 수 있는 만큼의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라도 믿는다는 것이다. 타자 신뢰를 하게 되면 인간관계의 궁극적 목표인 공동체 감각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공동체 감각은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의미한다. 반대로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한다.

3. 타자공헌은 내게 무엇을 해주느냐를 생각하지 않고,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나의 가치를 실감나게 하는, 일의 본질이다. (일=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행위->타자 공헌의 예) 책에서 얘기하는 조언 중 하나는, 인간관계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 집단에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7. 아들러 심리학에서 행복이란?

그래서 아들러 심리학에서 행복이란 공헌감이라고 한다. 여기서 공헌감이란 타인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객관적 공헌 행위가 아니라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 감각이다. 따라서 사람은 평가/칭찬하지 말고 공헌감을 주라고 한다. 칭찬 대신 "기쁘다". "고맙다"는 말은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P.S.1. 평범해질 용기

평범해지는 것은 무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일부러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할 필요가 없다. 이를 저자는 평범해질 용기라고 표현한다. 왜 평범해질 용기가 있어야 하는가? 특별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왜 위험하냐면,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완벽할 수 없고 반드시 못하는 것이 있다. 못하는 것에서 인간은 패자일 수밖에 없다. 이때 패자는 승자에게 못되게 굴게 된다.(열등감 콤플렉스, 평범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열등감 컴플렉스를 자연스레 만든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못되게 구는 이 열등감 컴플렉스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따라서 평범해질 용기가 있어야 한다. 평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다. 평범한 것은 무능이 아니긴 한데, 어떤 사람이 실제로 평범하면서 무능할 수 있다. 이때 이 무능한 인생에 의미가 있는가? 저자는 에네르게이아적 관점에서 인생은 항상 완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인생이던 의미는 있다고 한다.

한편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인생은 하나의 긴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으며, 인생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낸다는 사고방식이다. 태어날때부터 시작해서 종착점에서 끝나고, 굴곡이 크고 작은 길에서 말이다. 그러나 선처럼 보이는 인생은 사실 찰나의 연속, 즉 인생은 연속된 점이라는 것이다.

이때 성공한 사람들은 산 정상을 목표로 묵묵히 전진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람도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인생은 이 찰나를 뱅글뱅글 춤추듯이 사는, 찰나의 연속이다. 그러다 문득 주위를 돌아봤을 때 성공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왔다니!"하고 깨닫는 것. 작가가 된 사람은 집필이라는 춤을 추다가 그대로 작가가 된 사람이 있을 것. 바이올린이라는 춤을 추다가 전문 연주자가 된 사람이 있을 것.

즉 캐치볼을 하고 있는, 춤을 추고 있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지금을 즐기면 된다는 얘기다.

춤을 출 때는 춤을 추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춤을 추면서 어디론가 가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춤춘 결과 어디론가 도달은 한다. 춤추는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적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인생을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이라고 한다. 반면 목적지 도달하려고 하는 인생은 키네시스적 인생이다. 키네시스적 인생은 목적지/종착역에 도착하지 않는 경우 의미가 없는 인생이다. 따라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을 찾게 된다. 반면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가 된 운동을 의미한다.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즉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은 여행이나 춤을 추는 것과 같다.

따라서 무능하더라도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은 의미가 있다. 항상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항상 '지금 이 순간'이 본인 인생의 완결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때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은 존재의 차원과 인간관계에 대응되는 것 같다. 반면 키네시스적 인생은 행위의 차원과 일과 대응된다. 만약 키네시스적 인생을 산다면, 즉 행위의 차원으로만 생활양식을 가져가면 행위를 못하게 되었을 때 큰 타격을 받게 됨. 행위의 차원에서 자아를 실현하려고 하기 때문에 역경과 고난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키네시스적 인생과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책에서는 '사회와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표현하며 이 두가지 인생 전략의 균형을 강조하는 것 같다. 일과 인간관계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키네시스,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의 차원으로만 생활양식을 가져가면 육체적 고통에 대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도적 삶을 가져야 하는데, 어떻게 중도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일(이기적인 힘)과 인간관계(이타적인 힘) 그리고 사랑(이기/이타의 중간-나와 너가 행복하도록 하는 힘)을 모두 추구하면 두가지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것 같다. 미움받을 용기2에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에 나중에 정리 해보겠다.

특히 이 책은 키네시스적 인생을 인생 최대의 거짓말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정확히는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 인생 최대의 거짓말이라고 한다. 키네시스적 인생을 멀리해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그 이유는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고, 결정하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지금, 여기'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디에 도달해야 하는지를 보지 말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보라는 것이다. 책에서는 '먼 장래에 있을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하는 '지금, 여기'도 내 삶의 일부'라고 표현한다. 이게 무슨 말딴지같은 소리인가? 이 문장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학 입시 자체는 특정 결과를 만들기 위한 행위가 아닌가. 즉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것은 키네시스적 인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학 입시도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키네시스적 인생과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을 일치시키게 되면 대학 입시도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 입시, 돈, 대기업 취업 같은 세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가져야할 목표들을, 추구하는 인생은 키네시스적 인생이다. 이 행위들은 모두 하기 싫은 행위들 아닌가? 이런것을 하기 보단 그냥 게임하면서 놀고 싶다. 어떻게 이것들을 여행하듯이 할 수 있을까?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 춤추듯이 할 수 있을까?

[에네르게이아 (energeia, 형상(에이도스)은 질료에 있어서 실현되어야 할 목적이다->그 목적이 달성된 상태가 energeia)적 관점에서 우리 인생은 언제나 완결되어 있다.->우리는 목적이 있다? 목적은 확실하진 않지만 있다.->이 목적이 언제나 실현된 상태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인생에 의미는 없다.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에게 주는 것이다. 무의미한 인생에 인생의 의미는 내가 주는 것이다.]

내가 왜 키네시스적 인생에 접어들게 되었는지 분석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물론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아들러는 원인론이 아니라 목적론으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지만, 원인으로 문제를 분석할 필요는 있다.

생각해 본 결과 내가 키네시스적 인생에 접어든 원인은 굉장히 많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키네시스적 인생을 살 때 불행했다는 것이다. 왜 불행했냐면 특정 목표는 있었지만 공부는 안하고 하루종일 유튜브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는 유튜브를 보면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과연 내가 유튜브를 하루종일 보아야만 한다면 하루종일 볼 수 있을까? 하루종일 유튜브를 보는 것을 강제 당한다면 유튜브를 보는 것을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내가 봤을 때 공부가 재미 없었던 이유는 공부하도록 강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부가 강제되어서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공부에 대한 결과가 강제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공부라는 행위가 특정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에 인생이 재미가 없었고, 공부가 재미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유튜브를 보는 것은 원래 재미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 공헌감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해야 한다면 할 수 있는가? 할 수야 있겠지만 재미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게임, 유튜브 같은 활동들이 무의미한 행동들임을 인지하게 되고, 돈을 버는 행위, 사랑을 하는 행위 등등 세속에서 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행복임을 인지하게 되면 자연스레 키네시스적 인생과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이 같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P.S.2. 내 힘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왜 내가 가진 힘은 무한할까? 왜 내가 가진 힘은 엄청 클까? 그 이유는 우선 세계는 절대적인 외부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는 나에게 여러 견해를 통해 의식되는 주관적인 표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오직 나만이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 세계는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는 것이다.

2021.07.22

+P.S.1, 2: 2021.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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